느릿 느릿 인생

연동교회 주일예배 설교: 침묵하지 말고 전하라 본문

단밤

연동교회 주일예배 설교: 침묵하지 말고 전하라

들판 2011. 4. 11. 18:36

침묵하지 말고 전하라


 날 짜 : 2011년 4월 3일 
 말 씀 : 시편 83:1-2, 사도행전 18:9-11
 

설교 / 이성희 목사 
 
 
서론
 
  인터넷상에 ‘어느 쌍둥이의 옹알이 대화’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떴습니다. 쌍둥이 아기 둘이 서로 마주서서 얘기합니다. 대화가 말이 아니라 “다다다다 다다다다” 하면 상대가 또 “다다다다” 하다가 “하하하하” 웃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둘이는 한참 얘기하고, 다리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상대방의 말에 웃기도 합니다. 말도 아니지만 마음이 통하면 말도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말이란 세상을 뒤바꿔놓을 만한 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이 모두 세상을 바꿔놓을 만한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약한 말이지만 천하를 움직이는 말이 됩니다. 입을 닫고 있지 말고, 복음을 전할 마음만 있으면 “다다다다다” 해도 주께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입을 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입을 열면 마음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면 전해지는 법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12:17에는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고 있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전했고, 제자들도 담대하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용기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비겁함이나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둘 다가 용기의 반대입니다. 그런데 용기의 반대말로 가장 적절한 것은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체제에 순응하여 할 말을 못하는 것이 용기의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기드온, 노아, 다윗,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등이 신앙의 용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무도 환영하지 않던 바울을 공중 앞에서 지지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바울은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님을 전할 용기와 담대함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침묵했다면 복음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의 침묵했다면 하나님의 의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아이들이 잠잠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침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호산나’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오시는 왕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그 일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잠잠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할 때에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도는 헬라 문화가 발달한 대도시입니다. 그 때 밤에 환상 가운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면 침묵하게 됨 됩니다. 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위축되고 침묵합니까? 두려우니까 침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 1:2에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요나는 용기를 상실했습니다. 요나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서 외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친 것입니다. 라틴 격언에 “용기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일을 하는 중에 생기고, 두려움은 주저하고 망설이는 가운데 피어난다”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용기를 주십니다. 침묵하지 말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10절에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가장 우려하신 것은 홀로 남겨 둔 제자들이 두려워하면 어떻게 할까, 흩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8:20).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사방에 대적자들었습니다. 온 땅에 제자들을 해치려는 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제자들이 가는데 마다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고소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딜 가나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사울 때에 예수님을 잔해하였습니다. 이때는 세상과 친하게 지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전할 때에 세상과 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소를 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 40명이나 있었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갔을 때에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알고 동네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3번이나 태장을 맞았습니다. 40에 하나를 뺀 매를 5번이나 맞았습니다. 3번이나 파선을 당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사도행전 23:11에는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침묵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은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박해나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넉넉히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찬송에는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라는 은혜로운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어떤 시험이 와도 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어떤 고난이 와도 겁이 없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복음에 대하여 침묵하게 하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에 득실거리는 우리의 적을 보십시오. 요즘에는 인터넷 상에 얼마나 많은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있는지 모릅니다. 최근의 언론을 보세요. 온통 신문마다 안티 기독교입니다. 모든 언론이 안티 한기총입니다. 조선일보가 가장 기독교에 대하여 회의적인데 최근에는 반 기독교적인 기사를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기독교 기자는 ‘조선일보 너 마저도’라는 기사도 썼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조차 부끄럽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당당하게 침묵하지 말고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용기이며 믿음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전도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전도하면 “너나 잘 하세요” 할지 모릅니다. 복음을 외치면 시끄럽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초대교회보다 더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창피를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목숨을 건 상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았습니다. 이들을 잡아 공회 앞에 끌고 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대담한 말입니까?
  사도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화형을 당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나의 평생 86년간 나를 배반하지 않으신 주님을 내가 어찌 배반하겠는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은 “내 여호와여 나를 붙잡으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그를 책잡으려고 노려보는 일본형사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들 앞에 끌고 가거든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2:12에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다시 애급에 가서 백성들을 보내달라고 하려니 두렵고 떨리고 할 말도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출애굽기 4:12에는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쳐주시고 용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침묵이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침묵하지 맙시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둘째,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중에 주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10절 하반절에는 “이는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왜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까? 주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누구입니까? 바울의 복음 증거로 구원해야 할 많은 고린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시기로 택정한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 성내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구원받게 하실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우리를 통하여 구원하십니다.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니다. 로마서 10:14에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복음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하시듯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짓지 않으신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잘 못 태어난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입니다. 부모의 계획에 없었지만 생긴 사람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있습니다. 나아가서 사생아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잘 못 태어났다고 할지 모르지만 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한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 모두가 다 내 백성이다. 가서 그들에게 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9:37-38에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하십니다. 밭이 희어져 추수 때가 되었는데 추수할 일꾼이 없습니다. 일꾼만 있으면 거둬들이는데 일꾼이 없어서 거둬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밭이 희어져 있는데 추수할 일꾼이 없으면 다 익은 곡식을 거두지 않아 곡식을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추수할 알곡이 없는 것 같지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지만 많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 살아남아 있다고 했을 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구원하실 많은 사람을 남겨두셨습니다.
  한국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고들 말합니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교회가 더 많아야 합니다. 교회를 더 개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5,000만 우리 백성 가운데 4,000만이 예수를 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이 땅에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구원받을 백성을 많이 남겨 두셨습니다. 
  바울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어디 감히 대제사장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담대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입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입을 꿰매도 침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입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입이 있는 동안 전해야 합니다. 입을 벌려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백성이 이 땅에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 친척, 이웃, 동료, 그리고 우리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한번 전도하면 전도받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그 마음 밭을 갈아놓으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세상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할 이유이며, 복음을 전할 능력입니다.
  이사야 83:1에는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침묵한 적 없어. 너나 잘해”. 우리 모두가 복음에 침묵하지 말고 전하는 복음 전파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세계 2차 대전 후에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 지도자인 고백교회 마르틴 니뮐러 목사님은 히틀러 반대투쟁에 앞장 선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한다.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세계 대전의 전범자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정치적 반대투쟁으로 구속되어 8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한이 맺혔습니다. 그는 늘 마음으로 ‘이 원수, 이 죽일 놈’하며 옥살이를 하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출옥하였습니다. 이 때 이미 히틀러는 죽었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책임 고백서’라는 글을 썼는데 모든 전쟁의 책임이 히틀러에게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목사님은 7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차례차례 심판을 받는데 자기 앞에서 큰소리로 심판을 받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너는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라고 합니다. 그 때 그 사람은 “하나님,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귀에 익숙한 소리였습니다. 그는 심판받는 사람을 쳐다 보니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그 때 그는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은 바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히틀러에게 복음을 전했더냐.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서의 내용도 바꿨습니다. 히틀러가 아니라 자신이 전도하지 않아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도저히 예수를 믿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나가 볼 때는 니느웨 사람이 그랬습니다. 세상에는 도저히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강도로 살았던 예수님 곁에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절대 침묵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멸시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단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혼  (0) 2011.04.17
착각  (0) 2011.04.15
고민을 실체에 다가갈수록 나약해지는  (0) 2011.04.06
다소 무뎌진? 아니, 성능이 향상된!  (0) 2011.03.28
지금 이순간  (0) 2011.03.14
Comments